NIPPONIA 제45호 2008년 6월 15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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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sp_star.gif일본은 황금의 나라?!

황금의 나라 지팡구 전설

글●미야자키 마사카쓰(宮崎正勝, 전 홋카이도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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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의「타르탈리아 도」에 그려진 일본(그림 중앙).「예전에 마르코 폴로가 황금의 섬 지팡구리라고 불렀다」고 덧붙여 쓰여져 있다. (1570년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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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1254~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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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구 섬에서는 누구나 막대한 양의 황금을 소유하고 있고, 국왕이 사는 궁전은 순금으로 지붕이 이어져 있고, 손가락 두 개 정도의 폭의 두꺼운 순금이 마룻바닥에 빈틈없이 깔려있다. —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쓴『동방견문록』에 적혀있는 이러한 기술이, 황금의 나라「지팡구」라는 이름을 유럽에 알렸다. 그 후, 콜롬부스는 황금의 나라, 지팡구를 찾아서 대서양을 통해 서쪽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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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이 낳은 와쿠와쿠 전설

일본에서 최초로 사금이 발견된 것은 749년. 혼슈북동부의 오슈(奧州)에서 채취한 약 38kg의 황금이 당시의 수도인 나라(奈良)로 헌상되었다. 752년에는 높이 15.8m의 대불이 완성되는데, 그 때, 약 439kg의 오슈산 황금이 도금용으로 사용되었다. 황금으로 빛나는 대불은 신라의 사절단이나 당나라, 인도의 승려들에게 일본이 잘사는 나라임을 과시했다.

그 후, 매년 약 22kg의 사금이 오슈에서 수도로 보내졌다. 사금은 머지않아 당시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의 문명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견당사(遣唐使), 유학생, 유학승의 파견이라는 국가프로젝트의 자금원이 된다. 예를 들면, 804년의 견당사파견에서는 체재비로 대사(大使)에게 약 7.5kg, 부사(副使)에게 약 5.6kg의 사금이 지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절단은 약 500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으로 구성되어, 유학생, 유학승의 체제도 장기체재였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사금이 당나라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쏟아 부어진 셈이 된다.

이윽고, 당나라의 수도에서 퍼진, 잘 사는 나라 왜국(倭國)이라는 소문은 캉푸(廣州)에 머무르고 있었던 이슬람 상인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이 정보는 서아시아에까지 전해졌다. 상인은 황금에 관한 정보에 민감하다. 당시는 많은 이슬람 상인들이 다우라고 하는 범선으로 활발히 중국무역을 하고 있었다. 캉푸에는 12만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이슬람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베는 개와 원숭이의 목걸이가 황금으로 만들어지는 황금의 나라「와쿠와쿠」 (왜국을 지칭함)에 대해 중국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 이 와쿠와쿠 전설이 황금의 나라 지팡구 전설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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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정보원

일본은 송나라 시대에 들어선 중국으로 대량의 사금을 수출하고, 송나라로부터는 동전,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1124년에는 오슈에 쥬손지(中尊寺) 절의 곤지키도(金色堂)가 지어져, 중국상인들 사이에서 오슈의 황금에 관한 소문이 더욱 더 퍼져갔다.

몽골인과 이슬람 상인이 활약한 원나라 시대는 중국이 유라시아 규모의 무역에 참여하게 된 시대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훨씬 능가하는 국제무역항이 된 사이퉁(泉州)에서는 만 명이 넘는 이슬람 상인이 주도권을 쥐고, 예전의 와쿠와쿠 전설이 지팡구 전설로 부활했다. 중국 상인들이 쥬손지 곤지키도 등에 대해 전한 소문이 이야기를 부풀렸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유럽에 가져온 정보는 그가 사이퉁에서 이슬람상인으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르코 폴로는 후비라이 한이 일본 열도를 원정한 것도 황금을 얻을 목적이었고, 폭풍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일본에서 산출된 금은 약 255톤으로 추측된다. 그 양은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이전에 전 세계에서 캐낸 금 5천 톤의 약 5%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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